SERANG WORLD

블로그 이미지
by serang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김세랑'에 해당되는 글 212건

  1. 2008.04.14
    새 작업실 인테리어 작업중. 10
  2. 2008.04.11
    걸레같은 나의 육신에 시위를 걸다. 5
  3. 2008.04.10
    젊은이가 죽은 사회는 사회도 아니다! 11
  4. 2008.04.07
    민들레 홀씨 흩날리는 날. 4
  5. 2008.04.06
    그곳에 내가 있다. 1
  6. 2008.04.02
    예술이란 한발로 서 보는 것. - 김동원님이 바라 본 세랑. 10
  7. 2008.04.02
    Angel & Devil Wing Type03 2
  8. 2008.04.02
    디지털 사군자 - 도도한 그녀 1
  9. 2008.03.28
    석달간의 질주. 4
  10. 2008.03.27
    Go For Broke! - II 14
  11. 2008.03.25
    프로젝트 'D' - II
  12. 2008.03.25
    프로젝트 'D'
  13. 2008.03.24
    양면성 연작 - 눈물 짓는 자화상. 6
  14. 2008.03.24
    네개의 전시. 갤러리. 후배들... 6
  15. 2008.03.20
    SerangCast 청취주소 변경 안내 3
  16. 2008.03.19
    지하실에서 윤두서를 만나다 - 조선의 초상 두번째 2
  17. 2008.03.18
    초상화로 보는 드라마 '이산'의 어용화사.(전편) 2
  18. 2008.03.15
    바이크로 서울에서 용평까지 달리다. 7
  19. 2008.03.10
    COURAGE - '용기'. 가죽자켓 커스텀 페인팅 4
  20. 2008.03.07
    흔적 - 팔레트. 1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갓 정든 삼청동을 떠나야만 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
새로 이전하게 되면 'Art Space - Rang'으로 불리게 될 새 작업실은,원래 40년 가까이 된 구옥이라서 대대적인 수리와 인테리어 작업이 불가피해졌다.
혼자라면 엄두도 못낼 만큼 힘든 청소와 준비작업이 필요했는데, 고맙게도 한국컬러디자인학교의 피겨 디자인 수강생들이 자원봉사에 나서서 그나마 빨리 끝낼 수 있었다.
다같이 웃고 떠들며 오래된 시멘트 블럭 담장에 흰 페인트를 칠했고, 난 입구에 엔젤&데빌윙을 그려 넣었다.
이번주 내내 작업을 해야 해서 아직은 갈길이 멀지만 훌륭하게 서포트를 해주는 동료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걸레같은 나의 육신에 시위를 걸다' 연작중 두번째 스케치.
20Cm X 20Cm. 종이에 펜. 회화와 미니어처 조각을 위한 스케치.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학 2학년, 갓 스물을 넘겼을때 난 노래패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새학기가 시작된 어느 봄날,
노천강당에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었고
살랑이는 봄바람에 민들레 홀씨는
마치 제가 구름인양 하늘을 날아다닌다.

노래패 '민들레'.
맑고 고운 소리지만,
세상의 그늘진 곳도 노래하자며 뭉친 소리꾼들.
내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실크스크린 판화를 만들어
하얀 티셔츠에 인쇄해 만든 단체티를 입고
민들레가 지천으로 핀 그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겼다.

열정과 순수함과 정으로 뭉쳐있던 그때.
아름답고 착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의 노래...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색(色)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다.
내가 있다.
색이 없는 세상은
감정도, 사랑도 없는 세상이다.
내가 그 속에서 눈을 꿈뻑이고 있다.

간신히 희미한 빛이 들어오면
겨우 색을 알아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색은 색으로 알아보기 어렵다.
색을 입고 싶다.
색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 색으로
세상을 뒤덮어 버리고 싶다.


AND
오래간만에 이스트맨, 또는 동방형님이라고 불리우는 동원님을 만났다.
삼청동을 떠나기로 결정한 날, 문득 아직 삼청동에서 봐야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 시간을 동원님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통해, 대화를 통해서 내가 영감을 얻게 되는 몇분들이 계신데, 동원님도 그들중의 한분이기 때문이다.
이 글과 사진은 동원님을 만난후 김동원의 글터에 올리신 글을 스크랩한 글이다.
원문글의 주소는 http://blog.kdongwon.com/1028 이다.

나 스스로도 보지 못한 내 세계와 관점을 선사해주는 동원님의 글과 통찰력에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3월 30일 서울 삼청동 김세랑의 작업실 앞에서

오래 간만에 김세랑을 만났다.
미술하는 젊은 친구이다.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같이 점심먹고 사진을 찍으며
그의 작업실이 있는 삼청동, 그리고 가회동과 북촌의 한옥 마을을 돌아다녔다.
돌아와서, 찍어온 그의 사진을 보니 한발로 서 있다.
가끔 예술하는 사람들은 말보다 몸으로 얘기를 대신한다.
사진 한 장 속으로 상상력이 슬쩍 끼어들고,
그와의 대화 하나가 흘러갔다.

내가 묻는다:
“당신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가 답한다:
“나에게 그림이란 가끔 세상에서 한 발을 빼고 한 발로만 서보려고 하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발로 굳건하게 세상을 딛고 서려 한다.
두 발로 딛고 서면 자세가 안정되고 균형이 잡힌다.
적당히 살만한 좋은 집,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안정된 직장 등등이 두 발로 섰을 때의 그 안정감과 행복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꿈꾼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은 숙명적으로 두 발을 모두 세상에 내줄 수가 없다.
가끔 세상에서 한 발을 빼고 한 발만으로 서서
그 불안한 몸짓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서 두 발을 다 뺄 수는 없다.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일단 목숨의 연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그림은 두 발 중 하나를 슬쩍 세상에서 빼내고
그 하나의 발에 자유를 주는 것이다.
한발이 허공으로 들리면 그때부터 내 자세는 안정을 잃고 불안해 지지만
그 발은 허공에서 느낌이 가는 대로 길을 트고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
나의 경우
그 발이 끌고 가는 곳에 그림이 있다.”

그가 길가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멀리 경복궁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온통 세상이 꽉차 있었다.
그가 세상의 한 귀퉁이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림을 그리려 하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3월 30일 서울 삼청동에서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간의 양면성은,

인간의 본성이기 이전에,

가장 솔직한 감성이자 진리이다.

술에 취한 아침,

붓을 들어 내 솔직한 감성을 휘적이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Digital Photo With Re-touching, 2008.03.31. Serang

매화는 그 단아하고도 화려함으로 오랜동안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그 진한 향은 美人의 살냄새와 같으니, 한번 빠지면 한동안 정신이 혼미하고,

그 고운 자태와 색은 사각이는 치맛자락의 여운을 연상케 한다.

멋대로 뻗은 가지가 하늘을 잘라내니 그 도도함이야 이루말할 수 없건만,

그 난도질 마저도 아름다우니 그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초 의뢰로부터 장장 5개월여만에 결정이 난 프로젝트.
그동안 다섯번의 PT와 회의, 숱한 전화통화...
지난번 용평에서의 최종PT까지...
오늘 드디어 계약을 맺었다.
이제부터 앞으로 석달간은 그야말로 죽음의 질주와도 같은 정신없는 시간이 될 듯.

아울러 불과 10달이라는 짧았던 삼청동에서의 생활도 얼마남지 않게 될 것 같다.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했던 삼청동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작업 특성상 좀더 개방적인 공간이 필요해져서 작업실을 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6월이 두렵고도 기다려진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싸워서 부서지는 것은 두렵지않다.

다만,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나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Sketch For Sculpture & Painting. 18Cm X 18Cm. 종이에 펜.

무심한 현실의 역사는 꿈과 신화를 짓밟는다.
역사의 동검이 신화의 정수리를 꿰뚫을때, 나는 비로소 신화의 부활을 꿈꾸게 된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Sketch. 18Cm X 18Cm. 종이에 펜. 조형작업을 위한 스케치.

잃어버린 신화,
놓아버린 환상,
꿈을 꾸지 못하는 우리.

발굴되는 신화,
펼쳐지는 환상,
현실이 되는 꿈...

나는 오늘 진짜 신화를 만나고 꿈을 꾼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Concept Sketch For Sculpture & Painting. 18Cm X 18Cm. 종이에 펜.

AND
AM.11.00. 2X13갤러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청담동 2X13갤러리에서 열린 황일동씨의 개인전.
내 바이크 랩터를 만든 맷블랙 개라지 D.Hwang과 동일 인물이자, 이제는 아트그룹 GARAT로 미술활동중.

PM.12.20. 아트선재센터 서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젊은 작가들의 그룹전이 열리는 아트선재센터에서 한국현대미술의 경향을 만나게 됨.
소재집중적인 요즘 미술경향에 흥미를 잃게 만듦.
단, 북한 인민들의 고통이 엿보이는 손자수의 손맛만 기억에 남다.

PM.01.30. 몽인아트센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 동네인 삼청동 몽인아트센터의 입주작가 그룹전.
폴리와 수지를 이용한 작품들이 몇점 있었는데, 표현방식과 기법적인 면에서 재미있다. 정작 전시 보다는 콘크리트라는 재미없고 딱딱한 건축재료를 자연스럽게 사용한 건물의 디테일이 더 흥미롭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M.03.20. 대학로 홍익대학교 연건캠퍼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3회 모형동호회 연합전 관람.
오래간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사는 이야기, 한동안 듣지 못한 사람들의 소식을 듣게 됨. 프라모델 기법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는 안해도 되서 편하다.

PM.11.50. 대학로 주막.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의를 나가고 있는 마포 한국컬러디자인전문학교의 피겨 디자인 수강생들과 피겨 아티스트 고준과 함께 술과 인형 이야기를 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수강생들의 눈은 반짝거리고, 나는 점점 말이 많아 진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제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이전을 하면서 기존의 www.serang.co.kr로 접속하시던 분들의 불편을 덜어드리려고 웹 포워딩을 걸어놓았습니다.
기존 주소로 접속을 하더라도 여기 새로운 티스토리로 자동전환하게 하는 방식인데, 이로인해 세랑캐스트의 청취주소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크게 바뀐 것은 아니고 주소중 www. 이 사라졌습니다.

2. 서버의 용량문제로 인해 오래된 에피소드들 일부를 삭제했습니다.
기존에 청취하시던 분들중 예전 에피소드들을 보관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기존의 캐스트를 지우지 마시고 새로운 주소를 등록하신후 받아지지 않는 에피소드들을 백업하신뒤 기존 주소의 캐스트를 삭제하시면 됩니다.
새롭게 청취하실 분들은 그냥 http://serang.co.kr/cast/feed.xml 을 아이튠스의 Podcast등록창에 붙여넣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마 1997년쯤으로 기억한다.
모형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내가 연재하던 꼭지중에 '김세랑의 역사인물 기행'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건 우리 역사속의 유명한 인물들을 미니어처 피겨로 제작하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온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 밀어부쳐 연재한 꼭지였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에서 모형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 인형제작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전통을 소재로한 인형을 만들거나 공부하고 즐기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 인물을 정해 그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해낼때 마다 자료부족에 시달렸고, 주말이면 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찾아 전통 복식이나 무기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니곤 했다.

그날은 경복궁에 갔는데, 궁을 보기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국립중앙박물관(현재는 용산으로 이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1층의 도자기 컬렉션을 관람하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니 실내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유물들의 보존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주말 오전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관람객도 거의 없어 지하층엔 나 혼자만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단을 내려와 경복궁 미니어처를 보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복도를 지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딱 얼어붙고 말았다.

어둠속에 자그맣게 뚫린 누런 창을 통해 검붉은 얼굴 하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 불뚝 솟은 코, 핏기가 보이는 듯한 붉은 입술, 그리고 마치 광채가 나듯 번득이는 두 눈동자.
공재 윤두서는 그렇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흠칫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창이라 생각했던 네모난 부분은 그림의 바탕이 된 변색된 종이였고 그 속에 윤두서의 붉은 얼굴이 있었다.
그래, 이건 내가 잘 아는 그림이다.
교과서에서는 물론이고 미술사와 각종 도록을 통해 수십번도 더 본적이 있는 그림.
직접 마주한 공재의 초상은 내 예상보다 훨씬 작은 작품이었으며 책에 나오는 작은 사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놀라운 밀도로 이뤄진 그림임을 알 수 있었다.

정정면으로 노려보는 듯한 얼굴위로 한줄기 바람이 스치자 그의 눈썹이 한올한올 춤을 추었으며 속쌍꺼풀이 진 눈은 마치 맹호도의 그것처럼 형형한 안광을 뿜어낸다.
두툼한 눈밑 살을 지나며 튼실한 광대과 나오고 조밀한 필획으로 붉고 탄탄한 피부가 드러나고 있다.
발그레한 콧등은 늠름하고 다부진 입술에 와서는 더욱 붉어지고 마침내 풍성하고도 위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수염에 이르러서는 신이 들린 듯한 필획이 황홀할 지경이다.
실제 얼굴 크기와 거의 비슷한 이 그림은 300여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며 공재 윤두서와의 만남을 이뤄낸다.

당시 내가 이 그림을 보고 난 후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전통 초상화에 대한 지식이 미약했던 내게 공재의 자화상은 서양의 그 어떤 자화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품격과 감동을 전해주었고, 단순히 '잘 그린' 그림이기전에 온전히 윤두서의 인격과 인품, 그의 생각마저도 엿보게 해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공재는 이 그림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고, 그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려라. 나를 그려보아라. 아니, 나와 같은 그림을 그려봐라."

그것은 너무나도 두렵고도 흥분되는 목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덧글: 그동안 이 그림을 설명하는 말들에는 공재가 얼굴을 그리며 몸을 과감하게 생략해 그렸다는 식의 평론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이 그림은 원래 몸도 그려있었다.
공재는 이 그림을 그리며 포(두루마기 형태의 옷)를 입고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문제는 이것이 배채법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배채법은 종이의 뒷면에 윤곽선과 채색을 해서 앞에서 보면 선과 색이 은은하게 나타나게 하는 기법으로, 본래 비단등의 천에 그림을 그릴때 많이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런 원본의 상태를 미처 알지 못하고 그동안 세월이 지나며 여러번의 표구와 배접을 하는 동안에 이 어깨 윤곽선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실제로 일제때 촬영된 '조선사료집진속'에 실린 윤두서의 초상에서는 몸체의 윤곽을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ND
요즘 드라마 이산이 꾸준한 인기를 받으며 방영중이다.
대왕 세종이나 왕과 나도 있지만, 역시 이산이 인기를 끄는 것은 상대적으로 담담하면서도 따듯한 느낌을 주는 이병훈 감독의 연출력과 '도화서'라는 조선시대 궁중화원을 배경에 깔아 둔 덕일 것이다.
그러나 대장금에서 수랏간을 섬세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병훈 감독이지만, 이번 이산에서 보여지는 도화서는 전작에서 만큼의 디테일과 올바른 지식전달, 그리고 재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어용화사로 대표되는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 중요한 에피소드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실과 등장하는 소품, 그림의 내용등은 기대에 다소 못미친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의 언급으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우리 전통미술과 어진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내가 보는 관점에서의 어진, 그리고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해 두번에 걸쳐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드라마 이산을 꼬박꼬박 챙겨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드라마 초기에 등장한 이순재 선생님이 연기한 영조대왕때문이었다.
로보트같은 연기에 앵무새와도 같은 대사, 탈을 뒤집어 쓴 듯 무표정한 얼굴의 정조와는 달리 영조는 군주의 위엄과 지혜, 결단력을 온전히 표현했고, 무엇보다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실제 영조대왕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한 외모와 이미지를 풍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서 제일 왼쪽의 인물이 바로 영조대왕께서 즉위하시기 전인 영인군 시절의 초상이다.
치켜진 눈썹, 날카로운 눈매, 단정한 자세등에서 장차 보위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의 면모가 엿보인다.
뒤이어 설명하겠지만, 훗날 보위에 오르신 후의 어진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 초상화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가운데의 철종 어진은 일반적인 용포차림이 아닌 구군복을 착용한 상태로 그려졌는데, 이로 미루어볼때 철종께서 이 어진을 그릴즈음에서는 군주로써의 위엄을 나타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구군복은 조선 후기의 표준 군복으로, 요즘으로 치자면 대통령이 군복을 갖춰입고 표준 사진을 찍은 것과 같다)
이 두 그림은 모두 왕실에서 관리하던 진본이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인해 화를 입어 절반만 남게 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른쪽에 금관조복(제를 올리거나 나라의 공식행사때 입는 행사복)을 입은 인물은 채제공의 초상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번암대감'으로 불리며 정조를 보필하는 역할로 한인수씨가 연기하고 있는 바로 그 분이다.
이 그림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를 알 수 있는데, 이분의 눈이 '사시'라는 것이다.
사시, 즉 사팔뜨기로 그려진 눈은 그림을 그린 화공의 실력이 부족하거나 실수가 아니라 실제 채제공께서 이같은 사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이명기의 이 그림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기본이었던 '터럭 한올, 점 하나라도 사실과 똑같이 그린다'라는 당시 초상화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준다.

왼쪽의 영조어진은 나이가 들어 수염이 반백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인군 시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실제 영조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치켜올라간 눈매, 당시는 좋지 않겨 여겼던 매부리코등으로 보아 임금이라 하여 특별히 더 아름답게 그리는 식의 허세를 부리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바로 이 모습이 실제 영조의 모습이며, 드라마 이산에서 보여지는 이순재 선생님의 모습과 비교해도 잘 매치가 되는 인상이다.(아마도 캐스팅때 이 어진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도 잘 아는 단원 김홍도 역시 어진화사중의 한명이었는데, 그는 생전에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린바 있다.
이 영조어진은 육상궁 냉천전에 보관되고 있던 영조어진의 모사(원본을 그대로 베껴그림)본으로, 1900년에 그려진 것인데, 어쩌면 이 그림의 원본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용화사는 어용도감이라는 임시기관을 설치한뒤 도화서 내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검증받은 화원이 선발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의 이름난 화공들을 모아놓고 시험을 치룬뒤 그 실력이 최고라고 인정을 받아야만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이었기에 드라마에서 처럼 수종 다모 출신의 성송현이 정조의 어진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단원 김홍도를 등장시키고 송현이 그를 보필하는 수종화사로 등장했다면 드라마의 재미는 물론이고 그 개연성도 다소 높아질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습과는 실제 모습이 많이 달랐다.
실록에서 전하는 그의 모습과 비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정조의 초상(조선왕실 족보에 나오는 초상)을 보면 그는 전형적인 무골이었고 몸집이 비대했음을 알 수 있다.
거친 수염과 무서운 얼굴, 기골이 장대하고 살집이 많았던 정조대왕은 실제로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같은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정조는 지나친 독서로 인해 눈이 많이 나빠서 안경을 항상 착용했으니 드라마에 나오는 정조의 모습과는 현저히 달랐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주 이씨의 본가 경기전에 보관중인 태조 이성계 어진.
청색의 곤룡포를 입고 정좌한 상태로 그려진 이 태조어진은 수많은 화재와 난리로 인해 불과 몇점 되지않는 어진중에서도 그 존재가치가 높은 어진이다.
이 어진은 원본의 모사본으로, 진본은 따로 보관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장본인인 태조는 그 출신이 무관이었을뿐만 아니라 '신궁'이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다.
아래 일제시대때 촬영된 원본의 유리원판 사진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는데, 큰 귀에 광대뼈가 발달하고 단단해 보이는 입매와 풍성한 구렛나룻, 강직한 수염등이 태조의 성정과 인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과거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지금은 작고하신 고 김무생씨가 이성계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태조의 어진이 남아있었기에 그 이미지를 유추해낼 수 있었고, 김무생씨의 이미지가 태조와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어진들에는 공통된 몇가지가 보이는데, 사진이나 동영상이 없던 시대에 어진은 역대 임금들의 외모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이나 업적, 통치이념까지도 그림속에 담고자 했다는 것이다.
외모는 충실히 묘사하되 군주의 인품과 느낌까지도 담아내고자 노력을 했고,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가 필요할때는 군복을 떨쳐입은 당당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차원에서 이제 보게될 세종대왕 표준 어진은 매우 실망스러운 그림이다.
혜촌 김학수 화백이 현대에 와서 그리신 이 그림은 분명 우리가 아는 세종대왕의 이미지 - 온화하고 자상하며 한없이 너그러운 - 이지만, 문제는 실제 세종대왕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세종은 평소 몸에 병을 달고 살았는데, 이는 요즘으로 치면 성인병 때문으로 세종이 본디 상에 고기가 없으면 수라를 들지 않았을 정도로 육식을 너무나 즐겼고 수많은 후궁과 첩을 두었을 정도로 색을 밝혔으며 서책보기에 열중하다보니 안질이 와서 몹시 고생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대왕의 그 위대한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 용모는 지나치게 비만이었고 온갖 피부병과 안질로 몸이 몹시 상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원래 세종대왕의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진실은 뭍혀버렸지만, 기록의 정확도에서 타의 추정을 불허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데 실제 세종과 그의 '진짜 어진'의 모습은 분명 드라마 대왕세종에 등장하는 김상경이나 이 어진의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얼마전 TV에서 청와대에 대한 다큐를 보다보니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들이 등장하던데, 그저 증명사진을 모사한 것에 불과해보이는 단순한 초상화들의 모습에 실망했던 기억이 새롭다. 비록 위대한 왕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데에는 다소 불리할지라도 실제 모습을 정확히 묘사한 뒤에 그 속에서 그분의 인품과 업적을 담아내고자 했던 옛 화사들의 전통과 실력을 잇는 화백과 어진은 현대에 나올 수 없을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재 진행중인 일때문에 용평에 다녀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저녁때에는 다시 서울에서 볼 일이 있었기 때문에 차가 밀리는 것이 걱정되어서 그냥 바이크를 타고 가기로 결정.
작업을 하다가 밤을 꼴딱 새워버리고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기도 양평을 막 벗어나는 길이다.
물안개가 피어나는 양수리 두물머리의 풍경이 너무나 멋져서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주변에 차들이 하도 씽씽 달리는 탓에 촬영을 포기하고 그냥 달렸다.
바로 전날 비가 온 뒤라서 하늘이 맑다못해 투명하게 느껴졌고, 마치 그려놓은 듯 예쁜 구름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천을 지나 횡성으로 가는 길.
높고 낮은 산들이 자주 등장하며 강원도로 가는 길 임을 알려준다.
게다가 오늘 가는 길은 제작년 전국일주 당시 마지막날, 즉 서울로 돌아오던 귀향 루트를 정확히 되짚어 가고 있는 셈이라서 감회도 새롭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직 논에 물을 댈때는 안되었으니 아마도 어제 내린 비때문이겠지만 논 바닥에 비치는 하늘과 구름을 보니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원도 횡성을 지나 둔내와 장평 사이에 있는 태기산 정상에 선다.
거대한 송전탑이 거대괴수 마냥 서있고 제법 매서운 바람에 몸이 움츠러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싹 마른 겨울나무들이 하늘을 우러르며 애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원도는 아직 추웠다. 전날 서울 경기에 비가 내릴때도 이곳에는 눈이 왔던 모양이다.
곳곳에 남아있는 잔설과 눈이 닿는 끝까지 겹쳐지는 산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하늘도 여기까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평창을 지나 용평으로 가는 길 내내 진눈깨비가 내려 더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온몸에 흙탕물을 흠뻑 뒤집어 써야만 했다. 덕분에 40분이면 족할 거리를 한시간 반에 걸쳐 달려서 정오에나 용평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볼일이 용평 리조트의 한 호텔에서였기에 몸은 대충 씻을 수 있었지만 랩터는 몰골이 말이 아니다.
일을 마치고 용평에서 다시 서울로 출발한게 네시 정각.
장장 600Km에 왕복 8시간 가까이 걸린 힘든 여정이었지만 오전에 본 시원한 풍경들은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년, 올 한해는 내게 있어서 보다 강한 용기를 필요로 하게될 것 같다.
푸르 라 메리트(최고 명예훈장)를 그렸던 내 자켓에 은색 월계잎과 함께 
'Courage'라는 단어가 새겨진 리본을 추가로 그려 넣었다.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흔적은...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기억이다.

기억은...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불완전한 사실의 추억이다.

추억은...
내가 사랑한 누군가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다.

팔레트에는 나의 흔적과 기억, 그리고 추억이 담겨있다.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963)
Who Is Serang (7)
Fine Art (19)
Miniature Art (315)
Wearable Art (21)
SerangCast (56)
Serang,s Life (215)
Motorcycle Diary (75)
Movie & Fun (73)
Candle War (41)
Mac Life (69)
Military (27)
Art Shop (24)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