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새 비가 온다.
이제는 더이상 시원한 단비가 아니라 서늘함 마저 느껴지는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는 비다.
이 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흘린 땀방울은 이내 증발했고,
목놓아 외친 내 함성은 건물들 사이로 메아리 쳐갔다.
그리고 숱하게 쏟아낸 눈물은 이제 마를법도 하건만...
내 가슴속에는 아직도 노엽고, 슬프고, 원통함이 남아있나보다.
빗방울은 한방울씩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그 한방울 한방울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마침내 바다를 만들어 낸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저 빗방울처럼
우리의 목소리와 울분과 의지가 세상속으로 퍼져나가길...

유리창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분노와 눈물들이 숱하게 매달려 있다.



우리의 봉숙이... KBS 정문 계단에 오랜만에 앉아본다.
시대를 역행해 방송장악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3주만에 가본 KBS는 오랜만에 평온한 분위기.
물론 길 건너편에는 사복을 입은 정보과 짭새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는 했지만... 82쿡에서 전해준 파이도 먹고, 다인아빠의 팥빙수도 처음 먹어 봤다.
매일같이 투쟁의 현장에 있지만, 역할이 역할인지라 그동안 한번도 다인아빠와 82쿡 아주머니들의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는데 왠지 그 음식들을 먹으며 목이 메어온다.
원래 난 KBS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땡전, 땡노, 땡김뉴스로 이어지는 지난 부패정권하에서의 KBS는 '정권의 시녀'에 다름아니었기에 언제부터인가 '뉴스는 MBC'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겨우 방송독립성이 정착되려고 하는 시점에 터져나온 명바귀의 방송장악 음모는 역겹기까지 하다.
그 역겨움과 이 정권의 생지랄에 계단에 앉아 KBS의 지난 투쟁역사 영상을 보며 흘러나온 '민주언론 쟁취가'를 따라부르는 내 모습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바라본 내 옆에 앉은 사람, 동지의 손에 들린 촛불이 너무나 아름다와 보인다.
"당신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입니다."


최악이다.
석달간 지속된 거대한 국민들의 외침에 청맹과니처럼 눈과 귀를 모두 막아버린 이 오만한 정부에 슬슬 지쳐가고 있다.
거대한 여론의 용광로로 불린 아고라에도 알바들과 자조의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두달째 계속되고 있는 가투는 가뜩이나 지친 정신과 함께 육체적으로도 한계점을 향하게 한다.
피곤한가?
짜증이 나나?
우리의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 느끼는가?
최악의 상황에서 나는 희망의 꿈을 꾼다.
몇시간만 있으면 오늘이 될 8월 15일.
100번째 촛불이 켜지는 날.
아울러 갑호비상령이 떨어지고 정권의 개들에 의해 인간사냥을 예고한 날.
이 지독한 절망의 순간에 나는 희망의 꿈을 꾼다.
100번째 촛불이 켜지고 나면 거리 곳곳에 등장할 100만, 아니 천만의 양심들을 기대한다.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마치 20년전의 6월 10일 그날처럼 목에 태극기를 두르고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을 꿈꾼다.
이땅의 양심이,
이땅의 민주주의가,
이땅의 행동하는 지성이...
아직은 건재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펼쳐보이고 싶다.
전대협의 깃발아래서 대오를 안전하게 이끌고 구호를 리딩하던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가투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투는 우리들의 생각과 결심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승리를 가져오게 될 가장 빠른 길은 '더 많은 촛불들을 만들어 내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광복절의 투쟁은 이런 우리 스스로의 현재를 확인하는 날이 될 것이다.
흥분하지도, 절망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확인하자.
절망적이라면 까짓 눈물 쓰윽 훔쳐내고 다시 뛰자!
감격스럽다면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일을 준비하자!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거리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역사는 민중의 힘과 위대한 승리들을 증명하고 있기에,
나는 나 스스로를, 우리 국민들을, 그리고 자랑스러운 촛불들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최악의 상황에서 희망의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