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ANG WORLD

블로그 이미지
by serang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장면 하나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20여년전, 난생 처음 서울에 발을 디디며 서울역에 내린후 바로 보게 된 숭례문은 내게 '아, 여기가 바로 서울이구나!' 라는 감흥을 선사한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사 공부를 하며 한없이 초라한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에 분통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그나마 이런 건물들이 남아 있는 것이 어디겠는가 하며 스스로 위안을 하고 내심 뿌듯해 하곤 했었다.
임란당시 일본에 의해 훼손되고, 병자년에는 불태워지며, 다시 일본에 의해 무차별로 파괴되는가 하면 개발이란 명목하에 마구잡이로 변질되어 버린 우리 문화재들중 그나마 그 원형을 유지한 몇 안되는 서울의 자랑이 바로 숭례문 아닌가.

태조께서 조선을 창건하며 세워진 도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인 숭례문은 지독히도 불운한 한국사의 아픔을 모두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진정 당당한 우리 서울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나라의 가장 보배로운 물건' 제1호가 될 수 있었다.
숭례문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 600여년간 백성들과 삶을 같이 해온 '벗'이었다.
숭례문 주위에는 백성들의 삶이 펼쳐지는 상가거리가 있었고, 그것이 곧 지금의 남대문 시장이다.
100년 전만해도 숭례문은 백성들 삶의 터전이자 한낮의 찌는 태양을 막아주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며 늘 그곳에 서있는 보배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숭례문으로 나와있지만 앞에 반원형의 옹성구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흥인지문(동대문)일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숭례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같은 대란에서 살아 남았고, 잔혹한 일제에 의해 헐려버린 돈의문(서대문)과 같은 참사도 피할 수 있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우뢰와같은 폭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었다.
그런 숭례문이 불타버린 것이다.(아래 사진은 한국전쟁중의 숭례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떤 것은 함경도 백두산에서, 어떤 것은 바다의 비바람을 견뎌내며 자랐을 낙락장송에 제를 올리고 그것을 베어 육로로, 때로는 물길로 올라와 껍질을 켜내고 먹줄 한번 튕겨 대패질을 하던 대목장의 손길이 고스란히 뭍어있던 600년 전통의 건물이 단 몇시간만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숭례문은 단순히 불에 타고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다.
불길이 그의 속살을 태우며 나는 흰 연기는 제발 살려달라고 외치는 절규였고, 날름거리는 불꽃속의 선명한 단청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 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 지붕이 무너질때, 나는 6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녀온 그의 죽음을 보았다.
더이상 그의 명예와 혼백을 훼손치 말아야 한다.

감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최소 600년, 아니 수천년을 당당히 버티고 서있을 수 있는 새로운 몸을 그에게 주어야만 600년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그의 혼백이 다시 그곳에 깃들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년전, 내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밀리터리 테크니컬 어드바이저(군사자문)로 참가했을때만 해도 '과연 국내에서 이 영화를 찍어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해봐야만 했다.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서 오랜동안 전쟁영화의 맥이 끊겨있던 상태에서 전쟁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낯설 각 분야의 스텝들이 이런 특수장르의 영화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가장 큰 내 의문점이었던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래서 무척이나 어렵게 제작된 영화였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훌륭한 텍스트가 있었기에 이것이 모든 스텝들에게 좋은 교본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헐리우드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한국적인 재료와 양념을 버무려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제 소개할 개봉 예정작 [집결호]는 그 '태극기 휘날리며의 중화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집결호'는 1940년대 당시 중화인민군에서 사용하는 신호용 나팔소리중 '퇴각나팔 소리'를 듯한다.
영화는 중국 모택동의 인민정부와 장개석의 국민당군간의 국공내전을 배경으로 시작되며, 태극기 휘날리며가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에 배치한 것과 유사한 설정과 분위기로 진행이 된다.
탱크를 앞세워 밀려오는 국민당군의 공격 최전방 저지선을 맡은 중대장 구즈디를 주인공으로 그들의 영웅적인 최후와 명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이 영화는 훗날 중화인민군의 항미 원조 전쟁(한국전쟁 참전)까지도 양념 처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영화를 두고 빨갱이 영화라는둥, 중공군 참전을 미화한다는 등의 이념적인 시각으로 보는 네티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 영화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에서 만든 영화가 그들의 시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이런점에서 독일에서 만들어진 전쟁영화 '스탈린 그라드'나 러시아 영화인 '9중대', '즈베즈다'도 사실 이런 이념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국내에서 개봉이 되어서는 안되는 영화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논리라면 팍스 아메리카 사상으로 점철된 헐리웃의 수많은 영화 역시 배격해야할 대상 아닌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를 보다보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냄새를 물씬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영화를 연출한 감독 스스로가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향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말을 공공연히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진이 상당수 참여했기 때문이다.
강제규 필름과 명필름이 합병해서 만들어진 MK픽쳐스가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를 했고, 이에 따라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 특수효과를 담당한 데몰리션의 정도안씨, 시각효과를 담당한 강종익씨, 사운드 이펙트를 담당한 김석원씨, 특수분장의 신재호씨등이 이 영화에 참여해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며 쌓은 노하우를 고스란히 펼쳐 놓았다.

사실 집결호의 전투효과와 장면연출은 오히려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것보다 더 훌륭하다.
실제로 수년간 시간이 흐르며 기술이 더욱 발전했을뿐만 아니라 중국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보니 태극기 당시 시간과 예산문제로 포기하거나 축소해야만 했던 부분들이 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구현이 된 것이다.
게다가 중국 특유의 스케일과 물자 동원 능력,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비장미가 더해지며 집결호는 한편의 훌륭한 전쟁영화가 갖출 대부분의 요건을 만족시킨다.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 헐리웃과는 차별화될 이미지를 찾기 위해 백병전을 전면에 내세우고 고민하던 내 생각을 떠올리며 보게된 집결호는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인공인 중대장 구즈디는 마치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장동건)와 라이언 일병구하기의 톰 행크스를 뒤섞어놓은 듯한 인물이다. 다양한 전투 액션씬을 소화해낼 뿐만 아니라 후반부에 깊은 감정연기까지도 멋지게 소화해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영화는 공산권 무기와 국민당군이 사용한 서방의 무기가 어우러지며 당시의 시대적 재연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시각적으로 충분한 볼꺼리가 제공되고 만약 약간의 군사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전투씬에 등장하는 M26 퍼싱 전차의 위용에 환호성을 내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후반부에 등장하는 깡통 셔먼은 좀 깨지만...)

전쟁영화 매니아의 시각으로 보는 멋지거나 재미있는 장면 포인트들.
1. 막대한 물량으로 등장하는 국공내전 당시의 군복, 군장비들. - 저것들을 다 재현한 스케일이 부럽다.
2. M26 퍼싱 전차의 등장. - 단연 압권이다. 처음에는 실물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는데, 자세히 보니 중국제 차량을 개조해 만든 것 같지만 효과는 만점!
3. 깡통 셔먼. - 퍼싱과는 반대로 대충 만들어 등장하는 셔먼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것보다도 못하다.
4. 항미 원조 전쟁 장면 -  전투씬은 없이 잠깐 에피소드로 등장하지만 국군을 칭할때 '이승만 군대'라고 말하는 장면은 고증 100%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중화인민군과 북한군은 남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승만 괴뢰군'으로 불렀다.
5. 무기반납 장면에서 등장하는 영국제 소총 에피소드. - 국공 내전, 한국전을 거치며 생긴 중국군의 잡탕무기체계를 잘 보여주는 장면. 실제로 이 시기 중국군은 자국 무기는 물론이고 독일, 소련, 일본, 미국, 영국제 무기들을 닥치는대로 사용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반적으로 볼때 이 영화는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져 리얼리티 면에서도 훌륭하고, 이를 재현해낸 영화의 비주얼 역시 훌륭하다.
영화가 문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인민의 교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라는 사회주의 정신과 정책으로 미루어볼때 집결호는 중국인민들의 역사적인 의식을 고취시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이런 사상적인 배경을 떠나 우리가 보기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가장 불쾌하게 보게 될 사람들은 우리가 아닌 영화속에서의 적군, 즉 장개석의 국민당군이며 그들은 바로 지금의 대만(타이완) 국민들이다.
현재도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중국은 지금까지도 '저들을 바닷속으로 밀어 넣어 버리겠다'는 말을 서슴치 않을 정도로 대만을 멸시하고 있다.

마치 우리와 북한과의 관계같지 않은가?
이게 바로 내가 집결호를 중국판 태극기 휘날리며라고 부르는 이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멋지게 등장하는 퍼싱 전차. 국민당군이 사용하는 버전과 나중에 한국전쟁 장면에서 미군이 사용하는 것 두 장면에 걸쳐 등장한다. 처음에는 가동되는 실물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실제차량이 아니라 소련제 T계열의 전차를 카피해 만든 자국산 차량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탑 위의 기관총 탄약통을 보면 미국제 탄약통이 아닌 소련/ 중국군식의 탄약통이 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궤도와 로드휠(바퀴) 역시 퍼싱의 그것과는 다르다. 휠만 보면 T-34용 스파이더 휠과 닮아있는데, 정확히 어떤 차량의 휠인지는 찾아봐야 할 듯.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퍼싱과는 달리 여기 등장하는 셔먼은 완전히 '깡통' 수준이다.
아무리 중국이라고는 해도 역시 예산이 좀 부족했거나 시간이 촉박해 대강 날림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타이거를 연상시키는 수직 전면 장갑판과 짖눌려버린 포방패에서는 대략 안습~!
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등학교 연극제에서.

돌이켜보면 내가 미술을 하게되고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데에는 초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방학숙제로 만들었던, 찰흙을 빚어 만든 파도를 뚫고 솟구쳐 오르는 돌고래를 보신 미술선생님이 '세랑이는 커서 화가나 조각가가 되면 좋겠구나'라는 그 한마디가 내 인생에 첫번째 전환점을 찍어준 것이다.

이전까지도 무언가를 끄적이거나 만드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거나 잘 만들고자하는 노력따윈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일차원적인 욕구에 의해 만든 것이었고 내가 남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못그리는지에 대한 개념 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흙장난과 낙서하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미술'이란 두 글자를 각인시켜준 그날의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나의 목표이자 꿈은 연극과 영화를 향하고 있었다. 연기와 영상은 떠오르는 이미지에 가득차 있던 한 소년의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이자 오롯한 외길처럼 보였다.



고3 여름방학, 또한번의 전환점이 찾아오게 된다.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던 내게 미련이 남아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미술'이란 두글자는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만화그리기와 프라모델 만들기는 내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휴식이자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나간 사생대회에서 입상하게된 것을 계기로 견학을 가게 된 한 미술대학의 서양화 실기실에 들어서는 순간, 난 새로운 전환점에 발을 들여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코 밝지 않은, 어찌보면 다소 음침하게 느껴지는 실내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세로로 길게 난 창을 통해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코를 톡 쏘는 테레핀유의 송진향과 키를 훌쩍 넘겨 벽면을 가득채운 약 200호 정도의 그림이 앞에 서 있었다.
그날의 분위기는 완벽하게 기억하지만 그 그림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한데, 그게 어찌되었던간에 입시를 불과 두달반 정도 남긴 내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남긴 경험이었고 그 날 이후 난 미대입시를 준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학1학년 실기실에서 내 습작들과 함께.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양화 전공의 미대 1학년생인 나는 한 학기 동안 또 석고상을 그려야했다.
석고상 그리기는 분명 기초데셍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었겠지만, 늦깎이 미대입시를 준비하느라 남들의 세배, 네배의 양으로 지겹게 해댄 석고덩어리 그리기는 정말 재미없었다.
너무나 지겨웠고 고지식한 교수진의 방식에 대한 맹랑한 내 반항심은 석고상에 보이는 모든 명암을 반대로 바꿔그리기로 나타났다.
어두운 곳은 밝게 그리고 밝은 곳은 어둡게 처리하는, 마치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에 찍힌 것 처럼 말이다.
교수님께 불려가 혼쭐이 났지만 난 나대로 내 주장도 함께 말씀을 드렸다.

"잘 그리기는 쉽습니다. 잠자코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더욱 쉽습니다. 전 쉽게 잘 그리는 것 말고 좋은 작품을 그려내고 싶어서 미술대학에 왔습니다."

깐깐하고 무섭기로 소문났던 그 교수님의 표정이 일순 누그러지며 난 더이상 혼나지 않아도 되었고 덤으로 그 수업을 마칠 즈음 좋은 성적까지 받게 되었다.


1990년 취미가 창간 이후, 난 십수년을 한결같이 모형을 만들어왔다.
모형잡지사의 필진으로 시작해서 직원으로, 그리고 편집장을 거치며 건담, 캐릭터 인형, 전차, 비행기, 함선, 밀리터리/ 히스토릭 인형을 모두 섭렵했고 단품, 비넷, 디오라마를 가리지 않고 만들어댔다.
어떤 장르이건 머릿속에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만 하면 그것을 만드는 시간은 새로운 도전이자 즐거운 행위였다.
미친듯이 모형을 만들었고 많을때는 한달에 1/48 비행기 한대에 1/16 빅스케일 전차와 인형까지 해치우곤 해서 이대영 전 편집장님께서는 날보고 모형을 풀빵찍듯 만들어 댄다면서 '모형공장'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게 있어서 모형제작은 단순히 그 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표현해보는 일이었고, 그것이 미치도록 즐겁고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잡지사 시절 모형색칠중

괴로왔다. 
모형을 만드는 시간이, 모형잡지를 만드는 시간이 지옥과도 같았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다 내팽겨치고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을때 조차도 내 손은 쉬지않고 에폭시 퍼티 반죽을 주무르고 있거나 사포질을, 또는 붓을 잡고 인형의 얼굴을 색칠하고 있었다. 
10년을 넘게 직업으로 모형을 만들고 나니 머리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면서도 내 손은 마치 정교한 기계와도 같이 탱크에 워싱을 하고 블랜딩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모형이나 이미지를 만들기 보다는 독자들이 보고싶어하는, 또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몸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고 오로지 완성만을 위한 한없이 지루한 과정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매달 마감을 앞두고 착착 완성작을 뽑아내고 그걸 사진으로 찍어 기사를 만드는데 익숙해진 내 몸은 더이상 내것이 아니었고, 이미 나는 모형을 만드는 기계가 되어있었다. 진짜 '모형공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만성 목디스크로 인한 왼팔 마비증세까지 와버렸다.
팔에 힘이 빠지고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왼손으로 모형을 들고 있을 수 조차 없어서 탱크를 책상에 내려놓은채 엎드리다시피하고 오른손만으로 만들고 색칠을 해야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잡지 마감시간은 칼 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며 한달 한달을 버텨가던중 바로 그 날이 찾아왓다.
내가 더이상 나만의 생각과 이미지를 담은 '작품'이 아닌 '완성작'을 뽑아내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통렬히 알아차린 그 날 이후로 난 더이상 이 일을 계속해나갈 힘을 잃고 말았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라던가 건강문제같은 표면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후로 지난 2년간 난 모형에 손도 대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더이상 습관처럼 모형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십수년을 지속한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종종 미치도록 모형을 만들고 싶을때도 있었지만, 차라리 나는 모형이 아닌 옷을 만들어 입거나 그림을 그렸고, 더불어 바이크를 만들어 타고 여행을 다녔다.
의도적으로 모형을 멀리했고, 대신에 미술전시나 영화, 책을 보는 일이 많아졌으며 그저 혼자 바이크를 타고 이름모를 시골길을 달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팔자좋게 유람을 다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십수년동안 나를 지배해오던 것들과 싸우는 일 이었고, 그것들을 털어버리는데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마감이 지나면 모형잡지라는 이름으로 팔리게 될 '138페이지의 백지'에 무언가를 채워넣으려는 생각으로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머리속에 조금씩 새로운 생각들과 경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겨우겨우 나는 다시 모형 공구상자를 열 수 있었다. 
 
모형을 잘 만들기는 쉽다.
물론 모형을 잘 만들기위해서는 오랜시간과 경험, 그리고 각종 테크닉을 섭렵하고 그것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기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노력'을 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잘 만든다는 것은 '감성'보다는 '기능'의 문제이며 기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간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잘 만들기는 쉽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나는 잘 만든 작품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신기하고 정교하며 놀라운 작품보다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래서 내 작품을 보며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만들었나요? 도료는 어떤 것에 무슨 색을 쓴건가요?'라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슬픈 인형을 만드셨나요?', '보고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것이 반드시 모형으로 불려지지 않아도 좋고 스케일이 맞지 않아도 좋으며 꼭 잘만들고 잘 색칠되어보이지 않더라도, 그저 내 머리속에 있는 이미지와 가슴속의 감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이면 좋겠다.
거창하게 스스로 '예술'이라는 타이틀을 걸지 않아도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내 감성과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작품, 진정한 예술이 될 것이다.

모형제작이란 것을 직업으로 삼은지 올해로 18년째, 난 또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찍고 있다. 
당돌하고 거칠었으며 미숙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좋은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20살 어느 여름날 그때 처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나는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974)
Who Is Serang (7)
Fine Art (19)
Miniature Art (323)
Wearable Art (21)
SerangCast (56)
Serang,s Life (215)
Motorcycle Diary (75)
Movie & Fun (73)
Candle War (41)
Mac Life (69)
Military (27)
Art Shop (24)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25/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