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찌어찌해서 갑작스럽게 태권V 하나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요즘 태권V가 재개봉해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는 모양인데, 솔직히 은근슬쩍 돈벌이용이 되는 것 같아 그다지 달갑진 않고 차라리 오리지널 스토리를 바탕으로 약간 현대적으로 각색된 새로운 태권V가 나오길 기대할 뿐이다.
물론 현재 진행중이라는 신작 태권V는 전혀 이런 내 바램과는 다른쪽으로 가겠지만...
만일 내가 태권V 디자인을 한다면? 이라는 생각은 많이 했었는데, 막상 그려놓고 나니 이런 모습이 되었다.
오리지널 디자인의 원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원통형의 팔다리를 좀더 실제 인체형에 가깝게 바꾸고 액션이 가능하도록 관절구조를 개선해 본 것.
부분적으로는 태권도 도복(옷깃)과 방어구인 낭심보호대와 유단자의 상징인 검은띠(골반), 태권화(발)등의 이미지를 차용해 만들어 보았다.
러프스케치를 펜터치후 포토샵에서 색칠해 완성!
여전히 수작업이 편한데, 시간이 없어 그냥 컴퓨터로 색칠했는데, 이번에 포토샵 노가다에 지쳐서 조만간 페인터를 좀 설치하고 공부해 봐야 할듯 싶다. 흑~

왜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젯밤에 가볍게 술 한잔하면서 쓰라리게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60~70년대생들에게는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맹목적인 애국심 강요에 대한 반발심으로 잘 부르지도 않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는 살벌한 분위기의 아침조회에서 군대라도 들어간 것 처럼 치러내야 했던 기억들 때문에 태극기와 애국가는 한동안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그저 한 나라의 상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창시절 목격한 6월항쟁은 태극기에 대한 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은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매일 저녁 5시 30분이 되면 국기 하강식이 거행되며 길거리에서도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와 함께 국기를 찾아 경례를 해야했던 시절...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었고 조금은 귀찮기도 한 것이었지만 1987년 6월의 그것은 좀 달랐습니다.
여전히 곳곳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는 애국가와 펄럭이는 태극기는 여전했지만, 바로 그 5시 30분 국기 하강식에 맞춰 골목골목, 건물마다, 길을 가던 행인들이 일제히 차도로 뛰쳐나가 도심을 메워버리고 불렀던 애국가는 지루하고 따분한 애국가가 아닌 가슴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벅찬 느낌이었습니다.
부모님께는 숨겼지만, 저 역시 종종 그 대열에 합류해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도 매일 5시 30이 되면 가게 문을 닫고 대전역 광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최루탄 직사에 두개골 함몰상을 당해 즉사한 고 이한열씨의 사진은 저뿐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과 미래를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1987년, 그때 불렀던 애국가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분노의 눈물이었습니다.
80년 광주, 당시 전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어렸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그날 아침, 조회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나라에 큰 일이 났다."라고 말씀하시던 얼굴입니다.
남자선생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눈가에 눈물자국을 지우지도 못한채 들어오셔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던 그 일이 5.18이라는 것은 훨씬 뒤에 알게 됩니다.
대학에 다니며 소위 '교재'로 불리던 조악한 화질의 광주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방송들의 영상이 아닌 외신기자, 외국 민간인들이 촬영한 영상의 모음이었던 그 테이프는 훗날 다양한 다큐프로에 자료로 쓰여 이젠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당시 제가 본 것은 방송용으로 시신을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너무나 참혹해 공중파 방송에서는 삭제된 분량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원본영상이었습니다.
차량시위대의 행렬 맨 앞의 버스 위에서 상의를 벗어 던진채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던 한 청년... 결국 그분은 곧이어 이어진 발포로 인해 절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길바닥에 널부러져있던 수많은 시신들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리어카에 옮겨지고 겨우 태극기 한장이 씌워질 뿐입니다.
시신의 피가 배어 붉게 변한 태극기, 그리고 거리에서, 버스위에서, 마지막 밤 도청안에서 울먹거리며 불렀던 애국가...
1980년 5월의 태극기는 잔인하게 붉은 핏빛이고 애국가는 처연한 슬픔이었습니다.
1991년 여름, 전 시청앞 로터리(현재의 시청광장)에 있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을 등진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길과 골목이 전경대의 제복과 방패로 인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지독히 비현실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천지를 울리는 듯한 일제발사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뒤이어 비행궤적을 따라 흰꼬리를 그리며 눈앞으로 날아드는 지랄탄...
귓볼을 스쳐 지나간 지랄탄이 제 뒤에 있던 순대행상 아주머니의 순대삶는 솥을 뒤엎어 놓는 순간 숨이 콱 막혀오며 그대로 길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질식해버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최루가스속에서 아득하게 의식이 멀어질 즈음, 전 봤습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의 창가에서 회사원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던져서 펄럭이며 내려오는 한장의 태극기...
그 태극기로 인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1991년 여름, 최루가스 속에서 눈물 콧물을 쏟아가던 가운데 목격한 그 태극기는 '희망'이었습니다.
2002년, 다시 돌아온 시청은 10년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도로를 메운 젊은이들, 함성, 그리고 태극기와 애국가...
붉은악마가 상암구장에서 해치워버린 거대한 태극기 퍼포먼스는 가슴떨리는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절절하게 와닿았던 것은 선두에서 응원을 리딩하는 분들이 온몸을 쥐어짜듯 토해내던 사전구호인 "자랑스런 나의 조국~ 대~한.민.국!" 입니다.
전 지금도 그 목소리와 모습을 떠올리면 온몸이 찌릿해집니다.
2002년과 2006년, 붉은물결 속의 태극기와 애국가는 짜릿한 전률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60~70년대생들에게는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맹목적인 애국심 강요에 대한 반발심으로 잘 부르지도 않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는 살벌한 분위기의 아침조회에서 군대라도 들어간 것 처럼 치러내야 했던 기억들 때문에 태극기와 애국가는 한동안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그저 한 나라의 상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5시 30분이 되면 국기 하강식이 거행되며 길거리에서도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와 함께 국기를 찾아 경례를 해야했던 시절...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었고 조금은 귀찮기도 한 것이었지만 1987년 6월의 그것은 좀 달랐습니다.
여전히 곳곳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는 애국가와 펄럭이는 태극기는 여전했지만, 바로 그 5시 30분 국기 하강식에 맞춰 골목골목, 건물마다, 길을 가던 행인들이 일제히 차도로 뛰쳐나가 도심을 메워버리고 불렀던 애국가는 지루하고 따분한 애국가가 아닌 가슴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벅찬 느낌이었습니다.
부모님께는 숨겼지만, 저 역시 종종 그 대열에 합류해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도 매일 5시 30이 되면 가게 문을 닫고 대전역 광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최루탄 직사에 두개골 함몰상을 당해 즉사한 고 이한열씨의 사진은 저뿐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과 미래를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1987년, 그때 불렀던 애국가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분노의 눈물이었습니다.

어렸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그날 아침, 조회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나라에 큰 일이 났다."라고 말씀하시던 얼굴입니다.
남자선생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눈가에 눈물자국을 지우지도 못한채 들어오셔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던 그 일이 5.18이라는 것은 훨씬 뒤에 알게 됩니다.
대학에 다니며 소위 '교재'로 불리던 조악한 화질의 광주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방송들의 영상이 아닌 외신기자, 외국 민간인들이 촬영한 영상의 모음이었던 그 테이프는 훗날 다양한 다큐프로에 자료로 쓰여 이젠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당시 제가 본 것은 방송용으로 시신을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너무나 참혹해 공중파 방송에서는 삭제된 분량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원본영상이었습니다.
차량시위대의 행렬 맨 앞의 버스 위에서 상의를 벗어 던진채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던 한 청년... 결국 그분은 곧이어 이어진 발포로 인해 절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길바닥에 널부러져있던 수많은 시신들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리어카에 옮겨지고 겨우 태극기 한장이 씌워질 뿐입니다.
시신의 피가 배어 붉게 변한 태극기, 그리고 거리에서, 버스위에서, 마지막 밤 도청안에서 울먹거리며 불렀던 애국가...
1980년 5월의 태극기는 잔인하게 붉은 핏빛이고 애국가는 처연한 슬픔이었습니다.
1991년 여름, 전 시청앞 로터리(현재의 시청광장)에 있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을 등진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길과 골목이 전경대의 제복과 방패로 인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지독히 비현실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천지를 울리는 듯한 일제발사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뒤이어 비행궤적을 따라 흰꼬리를 그리며 눈앞으로 날아드는 지랄탄...
귓볼을 스쳐 지나간 지랄탄이 제 뒤에 있던 순대행상 아주머니의 순대삶는 솥을 뒤엎어 놓는 순간 숨이 콱 막혀오며 그대로 길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질식해버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최루가스속에서 아득하게 의식이 멀어질 즈음, 전 봤습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의 창가에서 회사원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던져서 펄럭이며 내려오는 한장의 태극기...
그 태극기로 인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1991년 여름, 최루가스 속에서 눈물 콧물을 쏟아가던 가운데 목격한 그 태극기는 '희망'이었습니다.

도로를 메운 젊은이들, 함성, 그리고 태극기와 애국가...
붉은악마가 상암구장에서 해치워버린 거대한 태극기 퍼포먼스는 가슴떨리는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절절하게 와닿았던 것은 선두에서 응원을 리딩하는 분들이 온몸을 쥐어짜듯 토해내던 사전구호인 "자랑스런 나의 조국~ 대~한.민.국!" 입니다.
전 지금도 그 목소리와 모습을 떠올리면 온몸이 찌릿해집니다.
2002년과 2006년, 붉은물결 속의 태극기와 애국가는 짜릿한 전률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국내에는 아직 개봉 예정이 잡히지 않은 관계로 안타깝게 커다란 스크린에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쟁영화 또는 비행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항공영화다.
세계 제1차 대전중에 등장한 신무기인 '비행기'는 전쟁의 양상을 송두리채 바꿔버린 엄청난 혁명이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어낸 이후 세계는 이 비행기를 전쟁에 활용할 방법을 놓고 미친듯한 기술의 질주를 시작했고, 비행기가 등장한지 불과 10여년 만에 인류는 하늘에서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제임스 프랑코가 주인공 블레인 롤링스 역을 맡았고, <레옹>의 프랑스 국민배우 쟝 르노, 미국판 <더 링>의 마틴 헨더슨, 신인배우 데이비드 엘리슨 등이 공연하고 있다. 연출은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 <스팅> 등을 제작한 제작자 출신으로 많은 TV 드라마를 감독한 바 있는 토니 빌이 담당했다.
Flyboys는 1차대전 당시 프랑스 군에 소속된 미국인 비행단 '라파예트 비행단(Lafayette Escardrille)'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아직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기 전,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자원한 미국인들로 구성된 비행단이다.
이 전통은 훗날 2차 세계대전에도 이어져 영국공군 내에 만들어진 미국인 비행대인 '이글 스쿼드런'이 생기기도 하며, 이 이글 스쿼드런의 이야기는 영화 <진주만>에서 벤 에플랙이 파견되는 부대로 잠시 등장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체코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공군에 입대해 스피트 파이어 전투기를 타며 겪는 일화를 그린 걸작 체코영화 <다크 블루 월드(Dark Blue World)>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1차 대전에 낳은 전설적인 에이스이자 독일의 영웅인 '붉은남작' 만프레드 폰 리흐토펜(Manfred von Richtofen)의 기체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포커 삼엽기가 시종일관 창공을 휘젖는 장면에서는 주먹을 불끈쥐며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영화속에서 주인공이 총알이 떨어져 죽기를 기다릴때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주는 붉은색 포커 삼엽기의 모습은 영락없이 '붉은남작'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강한 인상을 남겨준다.(여담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의 '붉은혜성' 샤아의 캐릭터가 바로 이 1차대전의 에이스 '붉은남작' 리히트호펜에게서 따온 것이다)
리히트호펜은 항공전 역사상 최초로 80기 격추라는 초대형 에이스 기록을 보유한 인물로, 실력만큼이나 뛰어난 인품으로 대원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적기의 격추가 확실시 되면 조종사가 아직 살아있어도 더이상 사격을 가하지 않았던 일화로 유명하다.
그덕에 훗날 그가 영국공군에 의해 격추되어 사망한 뒤 연합군 조종사들은 '더이상 전장에서 그를 만나지 않아도 되어 다행스럽지만, 차라리 그가 아군측 진영에 격추되어 악수라도 한번 할 수 있었더라면 더욱 기뻤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